흔히 프로야구의 탄생, 혹은 이와 비슷한 제목을 가진 글이라고 하면 프로야구를 창설하는데 정치적으로 누가 움직였다느니, 어떤 기업이 대상에 오르고 또 원하는 연고지를 배정받기 위해 어떤 신경전을 펼쳤다더라 하는 얘기가 주를 이룹니다.
그동안 너무 흔하게 돌아다녔던 이러한 스토리는 제쳐두고 제가 쓸 얘기는 팀의 어떤 감독, 어떤 코치들이 왜 오게 되었고 어떤 선수들이 모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중에 누가 주전으로 활약했는지 하는 선수단 구성에 관한 것들 위주로 하겠습니다.
프로야구의 선수선발과정은 철저하게 지역 연고주의를 택했다는 것,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드래프트도 없고, 선수들의 의사도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졸업한 고교의 주소지에 따라 그 해당지역팀에만 입단할 수 있었습니다.
예컨데 광주일고를 졸업한 선수라면 원하건, 원치않던 간에 해태타이거스에 입단해야 하고, 다른 팀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해태가 그 선수에게 관심이 없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즉 연고권을 포기하는 경우입니다. 간혹 그렇게 지명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실력이 있는 선수라면 쉽게 풀어줄 리는 없었겠죠.
결국 고향팀의 선수들를 일괄적으로 한데 묶음으로서 국민들의 지역적 호응를 유도한 반면, 지역간의 전력불균형은 피치못하게 되면서 시작할 때부터 야구가 활성화 된 지역의 팀과 그렇지 못한 지역의 팀간에 전력의 차이는 이미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2등수의 차이는 있었지만 82년 프로 첫해의 순위는 처음의 예상순위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죠.
그럼 한팀 한팀 각팀의 선수단을 알아보겠습니다.
1) OB베어스
순서는 그 해에 최종순위로 가는 편이 좋겠죠. 그 첫번째는 원년의 우승팀인 OB베어스입니다.
이 당시 OB의 연고지는 서울이 아니었습니다. 충청남북도였습니다. 이 충청 연고지는 프로 원년부터 3년간 계속 되고 85년시즌부터 지금의 연고지인 서울로 옮기는데 그 얘기는 뒤에 하겠습니다.
그럼 당시 OB의 선수들이 모두 충청도 연고선수들이었냐, 또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드래프트가 없었다고 했지만 선수단 수급이 어려웠던 당시 충청도의 사정을 감안해서 OB에 한해서만 선수자원이 풍부한 서울지역 선수중 1/3을 배당받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창단맴버중 대부분은 서울출신들로 구성됩니다. 이것은 OB가 서울지역에 어느정도 연고권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수선발에서만 그랬다는 의미입니다.
우선 OB베어스의 창단맴버들을 소개합니다.
<감독> 김영덕
<코치> 김성근, 이광환
<투수> 박철순, 황태환, 계형철, 박상열, 선우대영, 강철원, 김현홍
<포수> 김경문, 조범현, 정종현, 김진홍
<내야수> 신경식, 이근식, 김광수, 양세종, 박종호, 유지훤, 구천서
<외야수> 윤동균, 김우열, 정혁진, 이근식, 이홍범, 김유동, 구재서
김영덕감독은 실업야구의 최고 명문팀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일은행애서 선수와 감독을 지내다가 장충고를 잠시 거쳐 갓 창단된 신생강호 천안북일고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던 우리 야구계의 거물급 지도자중 한명였습니다.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재일교포 출신이기 때문에 천안북일 감독이라는 것만 빼면 OB의 연고지인 충청도와 직접적인 인연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천안북일고가 한화그룹 계열이기 때문에 빙그레가 초창기부터 프로야구에 합류했다면 한화-충청도팀-김영덕감독의 라인은 훨씬 자연스러웠겠지만 빙그레(한화)가 프로야구단을 만드는 것은 그로부터 3년뒤에 이야기입니다.
OB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코치들입니다.
훗날의 이름값으로 봐서는 프로야구 감독으로 시작해도 손색이 없는 두 코치들이었지만 당시 여섯개팀 밖에 되지않는 프로팀의 감독을 맡기에 신일고 감독 김성근씨는 한국야구에 인맥이 너무 없었고, 중앙고 감독 이광환씨는 너무 젊었습니다.
하지만 이 들 두 코치는 당시부터 촉망받는 야구계의 젊은 지도자들로 꼽히던 인물들로 김성근 투수코치는 KBS TV해설과 당시 유일한 스포츠신문인 일간스포츠 야구컬럼을 통해 국내 최고의 야구이론가로 인정받고 있었고, 이광환 코치 역시 모교인 중앙고를 이끌고 80년 기습적인 작전과 절묘한 용병술로 선동열의 광주일고를 격침시키면서 새롭게 떠오르던 인재였습니다.
김성근코치는 김영덕감독과 같은 재일교포였다는 인연으로, 또 이광환코치는 한일은행 시절 사제지간이었다는 각별한 인연으로 OB의 투수, 타격코치로 영입되었는데 이들 두 코치의 야구적인 견해차와 갈등은 뒤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고 일단은 선수단으로 넘어가죠.
당초 서울지역 선수들을 2:1의 비율로 MBC청룡과 나눠 갖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고 위에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 드래프트에서 우선권을 쥔 MBC가 김재박과 이해창을 지명하자 OB에서 1순위로 지명한 선수가 바로 박철순이었습니다. 첫해의 OB베어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죠.
(이 때의 드래프트는 비공개였기 때문에 각팀의 1순위 선수들만 알려져 있을뿐 그 뒤의 순서는 발표되지 않습니다.)
박철순.
고교만 세번을 옮겨다니고, 대학을 두번이나 중퇴했던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 투수는 가능성만 어느 정도 인정받았을뿐 실질적으로 한국야구에 그의 이름이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군복무시절 부터였습니다.
국가대표경력도 일천하고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려져 있던 그 선수를 OB는 과감하게 지명했고 그의 소속팀인 밀워키 블루워즈를 설득하는데 성공하면서 팀에 합류시킨 시점이 개막을 일주일 정도 남긴 시점.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프로첫해 22연승이라는 아직까지 깨지지않는 대기록과 투수부문 3관왕, MVP에 오르는 박철순의 OB입단 이전의 행보는 단독글로 써도 한편이 나올만큼 길기 때문에 과거에 썼던 글로 갈음하겠습니다.
에이스로 활약할 박철순을 중심으로 OB의 주력투수는 동대문상고 출신으로 포철에서 뛰고 있던 잠수함 박상열과 지금은 학교자체가 없어진 철도고(서울 용산구에 있었습니다.) 출신으로 한전소속이었던 황태환을 주력투수로 선발하고 여기에 실업팀 롯데소속의 야생마 계형철(중앙고 출신)을 보태면서 투수라인업의 가닥을 잡습니다.
하지만 이들 세명은 당시 실업선수들의 정년이라고 할 수 있는 30세전후의 선수들이었고 특히 계형철은 고교시절에도 후배면서 에이스였던 윤몽룡의 뒤를 받치던 투수로, 공의 스피드는 빨랐지만 고질적인 제구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만년유망주 선수였습니다. 뒤에 계형철은 30대중반에 접어들면서 OB의 에이스급 투수로 성장하게 되죠.
이밖에 OB투수진의 다크호스는 선우대영이라는 선수로 야구인 집안에서 태어난 서울고 출신의 좌완투수였는데 프로출범 이전해인 81년 제일은행에 입사해서 백호기 우승과 함께 우수투수상을 받았던 루키였습니다.
주력투수들중 가장 젊었던 선우대영은 기대와는 달리 프로원년 부상으로 인해 후반기부터 출전했고 이듬해인 83년시즌후 당시 선수들의 고심거리이던 군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되자 가족이 먼저 가있던 미국으로 영구이민을 떠나면서 그의 선수생활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5명의 투수들로 원년 OB베어스는 시즌을 준비하게 되는데 이들 5명은 위에서 언급했듯 모두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한 서울출신들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OB가 서울선수들을 배정받지 못하고 다른 팀처럼 연고선수들로만 선수단을 구성했다면 원년의 OB는 우승은 고사하고 꼴찌를 했었을 겁니다.
간략하게 쓴다고 썼는데 벌써 글이 길어졌네요.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은 다음편으로 넘깁니다.
* 이 글은 선수단의 구성에 대한 글입니다. 각선수에 대한 설명이 조금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이들이 프로입단 이후에 활약하는 모습은 차차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OB베어스의 포수진은 젊었습니다. 각자 개성이 강한 세명의 포수. 그것도 모두 대학을 갓 졸업한 동갑내기들로 구성되어 경험에는 문제를 보일 수 있을 지 몰라도 모두 고교시절부터 소속팀을 우승, 내지는 준우승으로 이끌었던 경력을 가지고 있던 선수들입니다.
그중에서 선린상 2학년시절인 76년 투수 이길환과 함께 봉황대기와 황금사자기 두번의 준우승을 경험한 정종현은 장타력을 앞세운 공격형의 포수로 다른 두명의 선수들을 밀어내기에는 조금 힘겨운 상태라 OB의 포수마스크는 김경문과 조범현, 투수리드나 송구능력, 팀을 이끄는 능력까지 난형난제였던 두 선수의 경합이 됩니다.
공주고를 77년 대통령배에서 사상 첫 우승으로 이끌고 고려대에 진학했던 김경문, 역시 77년 봉황기에서 충암고의 첫 우승의 주역이었던 인하대 조범현은 고교시절부터 대학에 걸쳐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다가 공교롭게도 프로팀에서 한솥밥을 먹게 된 것입니다.
(같은 학번으로 또한명의 거물급 포수였던 대구상-한양대의 이만수까지, 이들 78학번은 야구사에 남는 포수 풍년의 세대였습니다. 뒤에 82학번(장채근-김동기-서효인-김상국-김성현), 86학번(김동수-김태형-정회열-장광호), 98학번(현재윤-채상병-강귀태-허일상), 포수들은 이렇게 한번에 몰려서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죠.)
악연이라면 악연일 수 있는 김경문과 조범현, 두 동기생의 치열한 경쟁 스토리는 전에 쓴 글로 대체합니다.
투수 박철순을 제외하고 OB라인업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들은 백전노장 김우열과 윤동균입니다.
이들은 MBC의 감독겸 선수였던 백인천을 제외하면 전체 프로야구 선수중 최고령선수였는데 둘다 49년생으로 당시 나이가 만으로 32세,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니었습니다. 프로출범 이전에 야구선수들의 은퇴연령이 얼마나 빨랐는지 알 수 있죠.
한가지 재밌는건 생일이 빨랐던 윤동균이 프로 최연장자로 인정되어 프로야구 개막전의 선수대표 선서를 하였는데 고교졸업년도, 즉 실업팀 데뷔년도는 김우열이 1년이 빨라서 윤동균은 김우열을 형으로 부르는 사이였습니다.
아무튼 이들 두명은 실업야구시절부터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들이지만 고령이라는 이유로 MBC 청룡에게는 외면받았던 선수들인데다가 고교는 서울(김 - 선린상, 윤 - 동대문상)에서 나왔지만 원래의 고향이 충청도출신들이라 충청도 연고선수가 거의 없어 지역색채가 희박한 팀의 대표스타가 되기에 적합했습니다.
OB의 1루수, 고려대를 졸업하는 국가대표급 강타자 박종훈이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참가 - 이 얘기도 나중에 따로 언급하겠습니다. - 하겠다며 프로행을 1년 유보한후 실업팀 상업은행으로 입단해버리면서 공주고시절 김경문과 함께 우승경력을 갖고 있는 이근식(OB에는 두명의 이근식이라는 선수가 있었죠. 큰 이근식, 작은 이근식이라고 호칭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선수는 큰 이근식입니다.)이 유력한 후보였지만 뜻하지 않는 신인 한명이 떠오르게 됩니다.
신장 188cm, 전체 프로야구를 통틀어 두번째로 키가 컸던 신경식이라는 선수로 대학을 가지 못하고 상업은행에서 뛰던 21살의 어린 이 선수는 의외로 정확한 타격과 긴 다리를 쭉뻗어 송구를 걷어내는 유연한 수비동작을 앞세워 주전 1루수 자리를 꿰차게 됩니다.
신경식도 원래는 부산출신이었지만 공주고로 전학와서 졸업하는 바람에 학력으로는 OB 주전라인업에서 유일한 충청도출신 선수가 됩니다.
나머지 내야수들 역시 젊은 선수들 위주.
대전고를 나온 거포 2루수 정구선이 한창 군복무중이었기 때문에 선린상고-건국대를 나온 실업(농협) 1년차 김광수가 2루의 주인이 되어야 했지만 입단직후 부상으로 인해 이 자리는 역시 실업(상업은) 1년차, 하지만 고졸이었기 때문에 나이가 4살이나 어렸던 구천서의 차지가 됩니다.
박종훈, 정구선, 김광수 등의 대체선수라 할 수 있었던 이들 신경식과 구천서, 20대 초반의 두 선수는 모두 3할이상을 기록하는 기대밖의 맹활약을 하면서 OB가 어느 팀보다도 강력한 타선을 만들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밖에 장충고와 연세대, 그리고 제일은행에서 장신내야수로 활약하던 양세종을 주전 3루수, 대광고-상업은행의 유지훤을 유격수로 기용하는데 앞선 두 선수와 함께 이정도 내야라인업이라고 하면 수비면에서 6개구단 정상급으로 분류될 만큼 안정적인 라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젊디 젊었던 포수와 내야수들에 비해 외야수는 노장급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윤동균과 김우열의 얘기를 하면, 윤동균은 기업은행의 해체와 함께 창단된 포항제철에서 뛰다가 프로출범 약 2년전부터 포철의 플레잉코치로 승격되어 사실상 은퇴상태라 해도 무방했고 제일은행의 김우열은 국내를 대표하는 홈런타자이긴 했지만 젊은 시절 포지션인 내야수로는 더이상 뛰긴 힘들고 말이 외야수지 사실상 지명타자로나 나올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게다가 나머지 외야수들 중에 김유동이나 이홍범도 이미 은퇴해 있다가 프로출범 소식과 함께 다시 선수로 복귀한 케이스로 이처럼 OB의 외야수들은 조금 불안할 정도로 노장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는 상황이었지만 김우열은 시즌 중반까지 홈런 1위, 윤동균은 최종성적 타격 2위, 그리고 김유동은 OB가 우승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시리즈 만루홈런의 주인공이 됩니다.
다른팀 같으면 지명타자로 나와도 손색(?)없는 노장 윤동균과 김유동이 그나마도 수비가 거의 힘든 김우열에게 지명타자를 내주는 바람에 코너외야수를 맡아야 했고 이홍범과 함께 중견수로 자주 나왔던 선수가 (작은) 이근식으로 포수 조범현과 함께 충암고 시절 김성근감독의 지도를 받던 제자중 한명이었습니다.
OB에 두명이나 있었던 이근식이라는 선수들은 나이도 같았고 유년무렵에 대구에서 함께 야구하던 사이로 둘다 고교시절에 공주고와 충암고, 당시의 라이벌팀으로 각각 전학했다가 프로팀에서 다시 만나게 된 선수들입니다.
OB의 타선은 노장들이 많았던 데다가 구천서와 대주자로 나왔던 쌍둥이동생 구재서 외에는 젊은 선수들 중에서도 그렇게 빠른 선수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팀컬러는 파워를 앞세운 한방야구였습니다. (어차피 당시 홈구장은 잠실이 아니라 대전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전포지션에 걸쳐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수준높은 선수들, 노장과 신예가 적절이 조화되어 있었고 이들 선수들이 당대최고수준의 코칭스텝들과 만나면서 당초 2~3위권으로 점쳐졌던 예상순위를 넘어서는 성과를 올리게 됩니다.
물론 가장 큰 원동력은 리그를 평정했던 에이스의 힘이었지만요.
일단은 선수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OB베어스의 설명을 마무리하고 시즌중의 OB, 그리고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과정은 뒤에 다시 쓰겠습니다.
미국프로야구 마이너리그 출신으로 원년 한국프로야구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우승은 물론, 투수3관왕에 초대MVP까지 휩쓸었던 최고의 투수 박철순...
물론 원년의 맹활약에 이어 그 이후의 프로생활은 부상과 재기의 연속으로 힘겨운 선수생활을 거듭하면서 최고의 선수라기보다는 불사조라는 이미지가 더 어울리는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지만...
박철순은 82년이전에도 순탄한 인생을 보낸 적이 없을만큼 격랑의 인생을 보낸 선수입니다...
프로야구 원년시점에서 인물을 조명하고자 하는 이 시리즈에서는 주제에 맞게 83년이후 부상을 극복하는 시기보다 원년이전 박철순의 파란만장한 야구인생에 초점을 맞춰볼까 합니다...
실제로 프로에서 재기스토리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OB베어스 입단 이전의 박철순의 선수생활은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박철순의 고향은 부산입니다...
부산에서 초등학교시절, 후에 롯데감독이 되는 김용희와 선수생활을 함게 했었다고 합니다...
김용희가 고려대 74학번이므로 박철순도 74학번이 되어야 하지만 박철순은 75학번입니다...
고교를 세번이나 옮겨다는 와중에 1년의 유급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박철순은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이런저런 트러블로 학교를 더이상 다니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아예 부산을 떠나버렸던 박철순이 정착한 곳은 대전...
굳이 그 장소가 대전이 되었던 이유를 뒤에 회고하기로는 그저 정처없이 여행하다가 우연히 도착한 곳이 대전이었다고 하더군요...
박철순은 대전의 신생야구팀인 대성고에 2학년으로 편입하면서 선수생활을 이어갑니다...
그 당시에 3개월로 정해져있던 전학생 경과기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실력이 모자라서였는지 대전 대성고에서 박철순은 거의 공식시합에 나온 기록이 없습니다...
당시 대성고의 주전투수는 뒤에 삼미에서 프로생활을 하게 되는 정성만이라는 선수로 이 선수는 당시 충청권에서 상당히 촉망받던 투수였습니다...
하지만 대성고 야구부에 크나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지역예선 대전고와의 시합에서 대성고는 정성만의 역투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8회이후 심판의 편파판정이 연속되면서 대전고의 역전승으로 경기가 끝나자, 격분한 대성고 야구부원들이 심판을 집단으로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진거죠...
이 용서받지 못할 불상사로 대성고 야구부는 중징계를 받아 강제 해체되고 당시 2학년으로 벤치를 지키던 박철순은 심판구타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또다시 팀을 옮겨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박철순은 그이후 서울로 상경하게 되고 처음에 역시 신생팀이었던 충암고로 편입을 시도했지만 무산되면서 대신 배명고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배명고에서 3학년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몇차례의 전학끝에 가까스로 고교를 졸업하게 된거죠...
타고난 신체조건에 빠른 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철순은 75학번으로 연세대에 스카웃됩니다만 1학년시절 위궤양으로 거의 시합에 나가지 못하면서 1년만에 연세대를 중퇴하고 말죠...
얼마전에 썼던 투수 김현재가 그랬듯이 박철순 역시 대학중퇴후 입대의 길을 택했고 공군팀인 성무에서 박철순 역시 뛰어난 투수로 성장하게 됩니다...
실업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물론 78년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대표선수로도 뽑히게 되죠... (물론 이 대회직전 손가락부상을 입으면서 경기에는 나가지 못했습니다...)
박철순이 군에서 제대하던 78년말, 당연히 자유계약신분으로 실업팀을 선택하려고 했지만 김현재와 비슷한 이유로 이미 대표급선수로 성장한 그를 연세대는 놔주지 않았습니다...
군팀에서 두각을 보였던 77년말, 제대를 1년이나 남겨놓은 상태였지만 실업팀 롯데는 그와 비밀리에 입단계약을 체결하고 급여를 지급하고 있었는데 아마 박철순이 제대와 함께 무사히 롯데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면 그 뒤에 행보는 많이 달라졌었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아무리 제적상태라도 연세대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했던 것이 그시절의 규약이었고, 연세대는 끝까지 동의서를 써주지 않으면서 그의 복학을 종용하였습니다...
김현재와 박철순이 달랐던 점은 박철순은 제도에 순응하면서 연세대 2학년으로 다시 복학을 했다는 점이죠...
그런데 연세대에는 당시 국내 최고의 투수 최동원이 있었습니다...
슈퍼스타로서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최동원과 불같은 성격의 박철순은 이내 충돌하게 되었고 79년 3월, 박철순이 최동원에게 심한 기합을 주는 일이 일어나면서(항간에는 구타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만...) 최동원이 학교를 무단이탈해버리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최동원은 학교를 옮기겠다는 실현성없는 주장을 고집하다가 근 1년간 야구계를 떠나게 되고 겨우 복귀한 시점이 추계리그직전이었습니다...
그사이 박철순은 최동원을 대신해 연세대 에이스를 맡으면서 활약했고 특히 한미 대학야구대회에 참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동원이 복귀하면서 이번에는 박철순이 더이상 연세대야구부에 있기 힘든 상황이 되었고 박철순은 결국 또다시 연세대 2학년을 마치고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두 부산출신 에이스급 투수사이의 충돌은 단순히 선후배간의 위계문제가 아닌 좀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별로 좋지않은 일이라 더이상 언급은 안하겠습니다... (박철순과 최동원은 훗날 화해하면서 나란히 방송에 출연해서 그시절의 얘기를 웃으면서 하기도 했습니다...)
박철순은 연세대를 중퇴한 뒤 미국으로 진출하게 되죠...
바로 한미대회때 눈여겨본 미국의 스카우트가 그에게 접촉한 것이고 이때는 연세대도 흔쾌히 허락하면서 박철순은 백인천, 이원국에 이어 세번째로 해외 프로야구에 진출하는 선수가 됩니다...
80년 밀워키 블루워즈 산하 싱글 A팀에서 마이너생활을 시작한 박철순은 이후 1년만에 더블A팀으로 승격하였고 3년째인 82년에는 트리플A팀으로 또다시 올라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82년에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OB베어스가 1번카드로 그를 지명하게 됩니다...
지명한다고 해서 바로 한국에서 뛸 수 있을지 미지수인 상황에서 계약기간이 한참 남아있던 밀워키는 그를 보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협상능력이 탁월했던 OB의 박용민 초대단장이 직접 미국에 건너가서 밀워키를 설득, 결국 개막 직전에 박철순은 한국무대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얘기는 많이 알려진대로 원년 24승 및 22연승의 신화를 이뤄내지만 이듬해부터 부상에 신음하면서 박철순은 인간극장의 주인공이 되죠...
총 4번의 치명적인 허리디스크부상과 한번의 아킬레스건 파열로 선수생활을 이어가기 힘든 상태였지만 그때마다 투혼을 발휘하면서 재기, 햇수로 16년동안이나 OB-두산의 유니폼을 입었고 결과적으로 프로야구 원년맴버중 가장 오랜기간 선수생활을 하게 됩니다...
고교시절 어린 나이에서부터 남들이 겪지못했던 방황을 겪었던 것을 시작으로 선수생활 내내 순탄치 않았던 세월을 보냈던 박철순은 얼마전 암투병중이라는 뉴스가 나왔지만(심한 상태는 아니었다지만...) 역시 이번에도 병을 극복하면서 현재는 상당히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불사조라는 별명에 가장 걸맞는 야구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봅니다...